옛적에 내가 열녀전을 읽으매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여러 번 하였더니 이제 이에 눈으로 그 열녀를 보게 되매 이제야 지금의 열녀가 곧 옛적의 열녀요、옛적의 열녀가 곧 지금의 열녀임을 알겠으니 어찌 다만 열녀만 이겠는가? 옛적의 충효도 또한 지금의 충효요、지금의 충효도 또한 옛적의 충효와 같은 것이니 충성 효도 열녀 이 세 가지가 어찌 옛과 이제가 다름이 있으랴! 그러나 충효열(忠孝烈)은 이에 타고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원 성품인 것으로 사람이 그 천성을 지킨다면 모두가 가히 충신이 되고 효자가 되고 열녀가 될 것이니 하필이면 충효열이라 하겠는가? 세상에는 불충(不忠)과 불효와 열녀가 아닌 사람이 십상팔구이니 사람이 어찌하여 악을 좋아하고 착함을 하기를 미워하는가? 새와 짐승에 이르러서도 벌과 개미도 충성하고 수달피와 까마귀도 효도하며 물가의 갈매기도 열녀가 됨이 어찌 눈으로 오지 않았느냐. 그러나 충효열은 지금에 와서 보기가 거의 드문데 홀로 그런 열녀의 모범을 보인 것이 고씨부인 같은 이가 없으니 부인께서는 제주고씨 영도(榮道)의 따님이시다. 나이 十八세에 예산군 선비 인현용(印鉉用)에게 시집을 왔다. 시부모를 받들매 효도로써 하고 남편을 공경하되 별다름이 있었으며 친척을 좋아하매 화목으로써 하였다. 그러나 무단히 부부가 반목이 되어 친정으로 가서 있게 되었다. 친정에서는 젊은 나이를 불쌍히 여겨 개가(改嫁)를 권고하였으나 대나무와 국화의 굳세고 깨끗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수절(守節)하였다. 시가(媤家)의 제사와 시부모의 초상에는 친가(親家)로부터 참례하매 털끝만치도 감정이 없었고 살아서 모시고 돌아가시매 받들기를 효성으로 극진히 하매 온 마을이 그 효열(孝烈)을 칭송하였다. 이에 남편이 늦게야 깨닫고 데려다가 협방(挾房)을 얻어 살림을 차렸는데 이 또한 몇 달이 못 가서 남편이 돌아가매 길삼하여 모은 돈으로 초종상례를 성심껏 모시었으나 처음부터 반목(反目)하여 부부가 초월(超越)처럼 별거하였었으니 어찌 대를 이을 자손이 있었겠는가? 아들도 없고 딸도 없으니 즉 한 노처녀인 것이다. 이에 시댁 당질 태진(泰鎭)으로써 후사(后嗣)를 세워 유천가(流泉歌)와 도영(陶嬰)의 황곡가(黃鵠歌)라도 도리어 고씨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높고도 높도다. 옛과 지금의 열녀에 어찌 슬픔이 미치지 않겠는가. 서기 一九三六年丙子 八月十七日 族人 鍾華 撰